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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를 훑자

tomato23 2016. 1. 29. 19:13

고려시대 연표 






호족의 경우 등장배경이 통일신라 하대까지 올라갑니다..

보통 호족이라 함은, 지방으로 내려가 지방관으로서, 한 고을의

성주로서 지방관 벼슬을 하다가 중앙으로부터의 통제가 약해져

조세 등을 자기가 자체적으로 거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선동한 무리, 6두품 출신의 학자 중에서도 토박이들,

그리고 기존의 어떤 고을의 촌주 등으로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자처한걸 통틀어 호족이라 하는데요...

이들은 고려 5대 임금인 경종대까지 존재하면서

그 성질이 문벌귀족화 됩니다. 고려의 건국세력은 호족입니다.

호족연합국가였던 만큼(초기) 왕실에서 호족들을 우대하지 않을

경우 다시 제2의 후삼국을 유발할 수 있던 위험이 있었죠.

왕건은 그래서 호족연합정책을 위해.. 혼인과 사심관 제도 등을

사용하며 호족을 견제, 포섭하죠.

그러나, 왕권과 나라가 안정되려면 그러한 쓸데없는 간섭이나

위협이 없여야겠죠. 고려 4대 황제인 광종이 호족 숙청을 합니다.

죽어나간 사람이 꽤 되었죠. 심지어 자신의 황후인 대목황후까지

그리고 자신의 태자(경종)까지 위협 받습니다.

이렇게 숙청된 호족은 5대 경종 때 고개를 들어 복수전을 감행하는데

그 파급효과가 태조 시대의 호족들의 영화나 부귀를 부르지는

못합니다. 이미 과거를 통해 당당히 실력으로 급제한

관리들이 많았고, 광종의 귀화인(대표적인게 쌍기) 우대정책으로

귀화인들이 많았고 그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거든요.

여기서 호족들 역시 자연스레 신진 관료들과 동화됩니다.

피를 보고 자신들의 영화를 되찾기엔 너무 늦었죠.

성종의 통치제제 정비를 통해, 호족이 문벌귀족화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벌귀족화라 함은, 고려의 정치적 성격을 말하는데요.

음서제와 같이, 실력보다는 문벌, 가문 벌을 보고 따져 관리로

진출하는 이가 많아 귀족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벌귀족에서 무신세력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고려 17대 임금

인종과 고려 18대 임금인 의종 시대인데요... 인종대에

이자겸의 난, 모쳥의 서경천도 운동. 따지고 보면 문벌귀족들이

중앙에서 저지른 폐단이 쌓이고 쌓여 나은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의종대로 넘어가면서 여기에 환관(내시)들이 가세해

왕권과 결탁하여 일부 문벌세력과 연합, 고려 시대의 벼슬 중에서는

시험에도 없는 무과의 무신들을 차별하죠. 결국 폭발합니다.

보현원의 거사를 통해 마침내 정중부 이의방 연합 무신정권(초창기)

이 들어섭니다. 그런데 이들은 호족-문벌귀족으로 이어져온 세력이라기

보다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세력이라 할수 있습니다.

기존의 향리나 양민들이 무신이 되었는데 시기를 잘 만나서

중앙에 진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문벌귀족의 그 구성원이

무신집권기로 모조리 옮아갔다고 할 순 없습니다.

 

다음 무신집권기에서 권문세가로 넘어가는 부분은

고려 22대 고종과 23대 원종 시기로 당시 몽고와 항전중이었죠

무신집권 말기 정권의 수반이었던 임유와 임유무는

고려 원종 임금의 척신들에게 암살당합니다. 그러면서

권력에 공백기가 생기죠. 충분히 왕권 회복하고 그 다음에

원에 복종할 것인가 말것인가 논해도 되는 시기였는데

고려 원종이 대뜸 원나라에 투항하고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이때 삼별초란이 생기죠. 항쟁이라 해도 됩니다.)

이때부터 조정엔 뚜렷한 실력자, 실력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점차 원종 다음 24대 충렬왕, 25대 충숙왕 등을 거치면서

자연히 중앙정계에 친원파가 득세하게 되었고 이들이 소위 이른바

권문세족을 형성합니다. 이들의 성분은 무신정권에서의 무신세력 소수와

문벌귀족 사회의 문벌귀족 소수로 구분되었는데 시대를 잘 타서

출세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나머지 성분은 그냥 평민이나 향리들이

역시 치고 올라왔다고 보는게 실질적으론 맞습니다.

 

다음 권문세가에서 신진사대부로 넘어가는 기간은 좀 견해가

있습니다만 공민왕의 개혁정치부터 그 시점을 잡는 사람들과

최영과 이셩계의 이인임 일파 축출을 그 시점으로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유가,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입니다. 완벽한 실패는 아니지만 그래도

실패입니다. 권문세가가 고려 32대 우왕까지도 계속 득세했거든요

그러다가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고 신진사대부들이 등장하죠..

그리고 이들이 더 깊이 침투하는 것은 위화도 회군(1388)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물론 더 따지자면 급진파 사대부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봐야겠죠..

 

 

여기서부턴 간단합니다^^

 

일단 호족들의 공은 영토 확장이 대표적이고 후삼국의 통일이

대표적이죠. 왕은 당연히 태조 왕건 때겠죠.

 

문벌귀족들의 업적이라면 고려의 통치제제를 정비하는데

한몫 했다는 것과 고려의 문화정치 시대(고려 문종)를 열였다는데

그 의의가 있죠. 고려 성종부터 선종때까지 되겠습니다.

 

무신들의 업적? 이건 좀 그렇군요. 그런데 그들이 한 것이라면

최충헌의 시무책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사회 개혁의 명분은

걸었지만, 오히려 부패해 지게 하는데 한몫한만큼 ..

업적은 없고, 시기로는 고려 명종부터 원종까지입니다.

 

권문세족 역시 업적은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고려의 왕실과 조정을 원나라의 요청에 굴복하여 격하시키는

업적 아닌 업적을 이룩했다는 것이죠

시기로는 고려 충렬왕부터 공민왕때까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역사를 뛰어넘죠. 이들은...음...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민생을 약간 안정시켰으며 조선을 창업하는데 공이 있죠

시기로는 고려 창왕부터 조선조 태조까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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